2026/03/13 15

아이 없는 세상, 그리고 우리

이제 딸아이가 결혼을 하고, 출산을 위해 집에 내려온 지 2주가 넘었다.아마도 일주일 안에는 아이가 태어날 것 같다.안양에서 내려올 때 가져온 짐은, 출산 가방이라기보다 거의 이삿짐에 가까웠다.짐의 90퍼센트 이상이 태어날 아이를 위한 물건이었다. 조립식 아기 침대, 수유용 식탁 테이블, 기저귀 거치대, 이름조차 모르는 각종 육아 용품.하나하나를 정리하며 비로소 실감했다.아, 정말 아이가 태어나는구나.출산이 ‘준비’가 아닌 ‘프로젝트’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이를 둘 키웠다.첫째는 아들, 둘째는 딸이다.딸이 결혼 후 출산을 앞두자, 단순히 숫자로만 보면 인구는 그대로지만, 사회 전체에서는 이미 다른 현실이 되어 있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결혼과 출산에 대한 생각이 확연히 달라졌다.결혼을 하지 않거나 늦추고..

인생에세이 2026.03.13

기술의 수준이 아니라 사람의 기준

기술은 발전한다.그러나 사회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기준이다. 기술의 역사는 결국 인간의 선택의 역사이기도 하다.새로운 도구가 등장할 때마다 사회는 늘 같은 질문을 반복해 왔다.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기술이 쓰이는 방향은결코 기술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같은 기술이라도 누가, 어떤 판단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기술은 방향을 갖지 않는다.방향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의도와 가치 판단이다.그래서 같은 기술이 어떤 곳에서는 진보가 되고, 어떤 곳에서는 문제의 시작이 된다. 칼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셰프의 손에 들리면 한 끼의 따뜻한 요리가 되지만,살인의 의도를 가진 손에 쥐어지는 순간 흉기가 된다..

인생에세이 2026.03.13

장사의 문장

김해에서 공원돈까스는 이미 유명한 가게다.블로그와 유튜브를 통해 여러 번 접했고, 직접 방문해 보니 이 가게가 왜 살아남았는지는 비교적 명확하게 보였다. 가게는 주택정비구역 한가운데 있다.주변에 주택은 거의 없고, 유동 인구가 많은 위치도 아니다.입지로만 보면 장사하기 좋은 자리라고 하긴 어렵다.이곳은 우연히 걸어 들어오는 손님보다는,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이 있어야만 유지되는 자리다. 그런 위치에서 꾸준히 사람이 모인다는 사실은 이미 장사의 힘이 다른 곳에 있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손님은 꾸준히 찾아온다.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든다. 길을 지나가다 들어온 손님이라기보다, 목적지를 알고 찾아온 발걸음에 가깝다. 돈까스는 크다.한 접시에 나오는 양은 확실히 많다.하지만 이 집의..

인생에세이 2026.03.13

앞으로 걸어가기 위해 과거를 쓰다

나는 지인이나 후배들과 대화할 때, 가급적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다.공감이 필요하거나 분위기에 맞춰 맞장구를 쳐야 할 때만, 아주 잠깐 꺼낼 뿐이다.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싫었고,‘아재’나 ‘꼰대’라는 말로 정리되는 존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내가 예전에 어디에 다녔고, 무슨 일을 했는지는지금의 대화에 꼭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꺼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상대가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아대화의 온도를 식히는 것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장면이었다.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대화의 중심이 미묘하게 이동하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아왔다.상대의 현재가 아니라 나의 과거가 대화의 중심이 되는 순간이었다.그때의 공기는 조금씩 식었고, 대화의 방향도 자연스럽게 뒤로 기울었다.나는 그 장면이..

인생에세이 2026.03.13

아이디어보다 오래가는 것

스티커자판기 돌풍의 가능성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그 성공을 직접 목격하고도, 당시에는 그것을 하나의 ‘현상’으로만 봤다. 몇 년 뒤 자동차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에 나섰을 때, 그 경험은 교훈이 아니라 배경지식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어떤 장면은 시간이 지나서야 의미가 보인다.그때는 단지 유행처럼 보였던 풍경이, 뒤늦게 돌아보면 시장의 구조를 설명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읽지 못했고, 그 경험은 통찰이 아니라 기억의 한 장면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 시절 창업 시장의 키워드는 명확했다.복고, 차별화, 콘셉트. 거리에는 개성이 강한 가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간판보다 이야기가 먼저 보였고, 공간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처럼 소비자의 시선을 끌던 시기였다. 창업은 상품을 파는 일이 아니..

인생에세이 2026.03.13

내가 지나쳐버린 기회

나는 일생일대의 최고의 사업 아이템,그러니까 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눈앞에 두고도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쳐버린 사람이다. 자동차 회사 총무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다.총무부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비품 구매였다.책상과 의자, 컴퓨터와 프린터, 잉크와 토너 같은 사무용품부터고가의 영상 장비까지 회사에 필요한 물품 전반을 관리했다.몇 백 원짜리 볼펜부터 수천만 원짜리 장비까지가격의 폭도 넓었다. 나는 원래 새로운 기계와 장비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그래서인지 어느 날 부장님이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국제 광학기기 전시회에1박 2일로 다녀오라 했을 때출장은 부담보다 기대에 가까웠다. 넓은 전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각종 광학 장비를 구경하고 카탈로그를 모으던 중,전시장 맨 끝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기계 하..

인생에세이 2026.03.13

공정함의 기준이 바뀌는 순간

아침 뉴스 헤드라인을 스치듯 들었다.회사에서 복리후생비로 진행한 회식에 참석하지 않은 직원이,회식비를 N분의 1로 돌려달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이었다.뉴스는 짧은 문장이었지만 묘하게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아마도 그것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를 스치듯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짧은 한 줄의 소식이지만, 그 안에는 지금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처음에는 고개가 갸웃해졌다.하지만 곧 이해도 되었다.참석하지 않았고, 본인 몫의 돈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주장 자체는 틀리지 않다.논리만 놓고 보면 충분히 설명 가능한 요구였다.요즘 세대가 말하는 ‘개인의 권리’라는 틀 안에서는 더더욱 자연스러운 주장일지도 모른다.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단지 합리적인 계..

인생에세이 2026.03.13

소파를 떠나 시간 속으로

주말에 캠핑을 가지 않으면 나는 거의 집에 있다.소파에 누워 한 손엔 리모콘을 들고, 화면을 이리저리 넘긴다. 보고 싶은 게 있어서가 아니다. 할 일이 없어서다.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채널만 바뀔 뿐 화면은 비슷했고, 그 사이에서 나의 주말도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문제는 리모콘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나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시간이 유난히 아까웠다.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말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자신이 보기 싫었다. 피곤해서 쉬는 것도 아니고, 충전이 되는 것도 아닌데 몸은 소파에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이 익숙해질수록 더 불편해졌다.몸은 쉬고 있는데 마음은 전혀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순이 나를 더 지치게 했다. 그래서 캠핑을 ..

인생에세이 2026.03.13

경계에 선 노동자, 그 자리를 떠날 책임

자동차 회사에서 관리부서로만 거의 10년을 보냈다.총무부에서 시작해 안전과, 생산지원부(생산노무), 그리고 인사부(노무)까지.관리부서를 두루 거쳤고, 2000년 1월 나는 회사를 떠났다.조선소 설계 7년, 자동차 회사 관리팀 10년.도합 17년의 대기업 직장생활을 마감한 순간이었다.각 부서마다 배운 것이 달랐고, 매 순간 내 안에서 가치 판단을 요구받았다. 퇴사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D그룹의 해체와 몰락이었지만,그보다 더 깊게 나를 흔들었던 것은인사노무관리자로서의 역할이 내 안에서 만들어낸 갈등이었다.나는 같은 노동자이면서도회사 편에 서야 하는 노동자였다.회사와 현장 근로자 사이,어느 쪽에도 온전히 설 수 없는 경계의 자리에 서 있었다. 퇴근 후 현장 근로자들을 만나는 일은 업무의 일부였다.저녁..

인생에세이 2026.03.13

다음 세대의 목소리

오늘 점심, 딸과 함께 밥을 먹었다.아내와 임신한 딸, 이렇게 셋이서 고깃집에 갔다.고기는 아내가 굽고 있었고,나는 옆에서 거들기만 했다. 그때 딸이 말했다.“아빠는 왜 고기를 안 구워요?”나는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구우면 맛이 없어서.”그러자 딸이 분명하게 말했다.“아빠가 안 구우니까 그런 거죠.지금부터라도 구우면 되잖아요.”딸의 눈빛이 반짝이며,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할 말이 없었다.그냥 “알겠다”라고 했다. 예전에도 이런 말은 들은 적 있다.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도.그때는 흘려들었다.아이 말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딸은 곧 아이의 엄마가 된다.이제는 하나의 성인이고,완전체로서의 어른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아이의 말이 아니라다음 세대의 말이라는 걸.뜨거운 불판 위의 고기처럼..

인생에세이 2026.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