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 41

연극을 보러 갔다가, 내 인생이 연극이라는 걸 알았다.

어떤 경험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끝나 있다.우리는 아직 보지 않았는데도, 마음속에서는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다.그리고 그 순간, 중요한 장면 하나가 조용히 사라진다.몇년전 아내가 갑자기 연극을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왠 연극? 하고 반문을 하니 아내가 웃으면서 아는 지인이 초대권을 주었다고 했다.그 말은 가볍게 던져졌지만, 나는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아직 보지도 않은 무대를 마음속에서 정리해버린 상태였다.그때의 나는 ‘보는 것’보다 ‘아는 것’을 더 믿고 있었다.내심 연극에 대한 관심도 없고 별재미 없을거라는 생각이 머리에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극장에서 보는 큰화면도 아니고 음향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기에 무관심이 맞다고 하는게 더 정확했다.설명..

카테고리 없음 2026.05.29

광고는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들어왔을 뿐이다

광고보다 더 무서운 건, 광고가 아닌 척하는 말들이다.예전에는 광고와 홍보의 차이가 지금보다 훨씬 명확했다.광고는 TV와 라디오를 통해 우리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반면 홍보라는 개념은 지금처럼 드러나지 않았다.TV 속에서 반복해서 보이던 제품을 사고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었다.그건 나도 이 정도는 누리고 산다는 작은 증명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우리는 매일 같은 광고를 보고 들었다.귀에 익은 이름은 좋은 제품이 되었고, 자주 보이는 브랜드는 믿음이 되었다.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정보보다 설득에 가까웠다.아니, 설득보다 더 조용한 쇠뇌였는지도 모른다.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광고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 순간 묘한 실망감이 밀려왔다.이유는 단순했다.광고는 돈을 내고 하는..

카테고리 없음 2026.05.28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조용한 기준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니었다.누구를 오래 곁에 둘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이었다.어떤 사람은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졌고,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낯설어졌다.관계는 결국 감정이 아니라 기준의 문제였다.1. 오해받을 자유와 침묵의 비용사람은 설명되기 전에 이미 판단된다.그래서 관계는 언제나 오해 위에서 시작된다.오해는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이다.누군가는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결론을 내리고, 누군가는 일부만 보고 전체를 안다고 믿는다.여기서 대부분은 설명으로 해결하려 한다.하지만 설명은 관계를 회복시키기보다, 오히려 자기 증명의 루프를 만든다.모든 오해를 풀려는 사람은 결국 삶을 해명으로 소비하게 된다.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점점 사라진다.관계는 설명으로 유지되지 않는다.설명 없이도 유..

카테고리 없음 2026.05.27

"감사합니다”와 “고맙습니다”는 같은 말이 아니었다

오늘 쓰레드 글을 읽다가 발견한 문구 하나가 마음을 이끌었다.“감사하다”는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고마운 마음을 느끼는 뜻이고, “고맙다”는 우리말로 누군가의 도움이나 호의에 마음이 흐뭇하고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단어는 설명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다.같은 말인데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마음의 깊이는 전혀 다르게 전달된다.우리는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관계의 온도를 바꾸고 있다.단어를 이해하는 순간, 의미보다 결이 먼저 다르게 느껴졌다.같은 감정인데도 말이 다르면 마음이 머무는 자리도 달라진다.그래서인지 “감사합니다”는 예의가 느껴지고 “고맙습니다”는 마음이 더 느껴진다고 한다.짧은 문장인데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예의와 마음은 같은 말이 아니라 거리의 차이다.우리는 너무 자주 말의..

카테고리 없음 2026.05.26

사람에게 지친 시대, 우리는 왜 동물을 가족이라 부르게 되었나

애견·애묘라는 단어조차 모르고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어린 시절 우리 집에도 강아지가 있었다. 지금처럼 품종을 따지고 이름을 붙여 키우는 개가 아니었다. 동네에서는 그냥 ‘똥개 새끼’라고 불렀고, 우리도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했다. 지금 돌아보면 반려라기보다 사육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린 나는 몰랐다. 품에 안고 자던 체온과 학교를 다녀오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던 모습만 또렷하게 남아 있다.먹이는 것도 단순했다. 집에서 먹고 남은 밥과 국을 한데 모아 주는 게 전부였다. 예방접종이나 건강관리 같은 개념은 희미했고, 개는 가족이라기보다 집을 지키는 존재에 가까웠다.골목에는 돌아다니는 개들도 많았다. 아이들은 돌을 던지거나 막대기로 겁을 주며 쫓아냈다. 지금 기준이라면 분명 동물학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시..

카테고리 없음 2026.05.25

우리는 왜 매번 같은 정치에 실망하면서도 또 투표하는가

정치인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국민의 신뢰를 먹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국민의 피로와 분노를 먹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심한 말 같지만, 오랜 시간 정치판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쉽게 부정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나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정치인의 말을 들었다. 선거철만 되면 거리로 나와 허리를 굽히고 시민을 섬기겠다고 말한다. 국민을 위해 살겠다고 외친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당선이 되는 순간, 그 모습은 너무도 빠르게 달라진다. 낮은 자세는 사라지고 권력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들이 반복된다.우리는 그런 장면을 너무 오래 보아왔다.벌써 40년이 넘었다.그래서인지 이제는 정치인의 말보다 표정을 먼저 보게 된다. 공약보다 눈빛을 보게 된다. 정말 국민 걱..

카테고리 없음 2026.05.25

사기꾼보다 더 위험한 것은 기대였다”

내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내가 살던 창원과 처가집이 있는 김해는 산 하나만 넘으면 될 정도로 가까웠다. 주말이면 자연스럽게 처가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어느 날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당시 삼미그룹 부회장이 미국에서 들어와 장모님의 동생인 이모를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황당했지만 직접 볼 기회가 생겼다.장인어른은 낚시를 좋아했고, 그 사람도 함께 있었다고 했다. 미국 생활이 길어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햄버거를 사 오라고 해서 우리 부부는 햄버거를 들고 갔다.처음 본 순간 이상했다. 허름한 옷차림, 세월에 찌든 얼굴, 카세트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리는 어설픈 영어 소리까지. 대기업 부회장이라는 분위기와는 너무 멀었다.그런데도 장인어른, 장모님, 친척들 모두가..

카테고리 없음 2026.05.25

살아남기 위해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어제 멀리 인천에서 내려온 처제 부부와 우리 부부, 장모님, 처남까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집에서 준비한 음식들을 꺼내 놓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오래 따뜻했다.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과의 식사는 늘 그렇다. 음식보다 시간이 먼저 기억에 남는다.예전에는 그래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먼 지역으로 떠난 뒤부터는 얼굴 한 번 보는 일조차 쉽지 않아졌다. 나는 그 선택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안다. 사람은 단순히 집만 옮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온 시간까지 함께 옮겨야 한다.익숙했던 거리.늘 지나던 골목.부르면 금방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장소에 남기며 살아간다..

카테고리 없음 2026.05.25

전통은 왜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 유지되는가

벌초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아버지를 대신해 형과 내가 결혼을 한 뒤부터, 우리는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남해로 내려가 벌초를 했다. 삼촌도 함께했다. 나이가 많이 드신 삼촌과 형, 그리고 나. 셋이서 예초기 두 대를 번갈아 메고 산을 오르내리며 여섯 기의 묘를 하루 종일 정리했다.처음 벌초를 시작했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몸이 먼저 떠오른다. 예초기를 하루 종일 돌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손이 계속 떨렸다. 손바닥은 얼얼했고 어깨는 무너질 듯 아팠다. 밤이 되어도 손끝의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마치 몸 안에 작은 기계가 계속 돌아가는 느낌이었다.그때는 그냥 당연한 줄 알았다. 아버지가 하던 일이었고, 집안의 어른들이 해 오던 일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직접 해 보니 벌초는 단순히 풀을 베는 일..

카테고리 없음 2026.05.25

들키지 않을 만큼만 살아가는 사람들

성인 남자에게 하루를 시작하며 가장 귀찮은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면도라고 말할 것이다. 하루만 지나도 얼굴에는 수염이 올라오고, 이틀만 지나면 사람의 인상까지 달라진다. 피곤과 무기력이 가장 먼저 얼굴에 걸린다. 결국 사람은 다시 면도기 앞에 선다.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수염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칼면도기를 쓰기 시작한 뒤부터 이상하리만큼 더 빠르고 거칠게 자라났다. 매일 면도를 해야 했고, 그때마다 피부는 쉽게 베였다. 세면대에 번지는 붉은 피를 바라보며, 나는 왜 이 귀찮은 일을 평생 반복해야 하는지 생각하곤 했다.성인의 상징처럼 자라는 수염이었지만, 내게 그것은 어울림보다 피로에 가까웠다.결국 나는 건식 전기면도기를 샀다. 절삭력은 조금 부족했지만 피부를 베지 ..

카테고리 없음 2026.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