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세이

형제라는 이름 아래, 남겨진 거리

초심행님 2026. 2. 24. 07:34

1. 떠나는 손의 기억


나는 아주 어릴 적, 엄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있다면 다섯 살 무렵, 엄마가 500환을 쥐여주고 떠나던 장면뿐이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친모의 전부다.

나는 숙모 손에서 자랐다. 사실상 엄마 없이 큰 셈이다.

자라면서 들은 이야기는 더 복잡했다.
친모는 아버지가 수리하고 판매하던 시계를 모두 들고 집을 나갔다고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배다른 동생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한집에서 자랐다고 말하기 어렵다.
막내 여동생은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이모 집으로 보내졌다.
이모가 학교를 보내고 키웠다.

함께 자랐다는 기억보다, 흩어졌다는 기억이 더 선명하다.
2. 뒤늦게 나타난 형


중학생이 되던 어느 날, 내 앞에 ‘형’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보다 네 살 많은 형이라고 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충격이었다.
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여자가 있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형이 있었다.
그 형의 어머니도 집을 떠났다.

형은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라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우리 집으로 왔다.

비좁은 다락방에서 형과 나는 함께 지냈다.
그러나 함께 살았다고 해서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과 나는 잦은 갈등을 겪었다.

한 번은 화가 나서 나는 형을 쓰러트리고 소리쳤다.
“나는 형이 없어!”

그 순간, 형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3남 1녀였고, 어머니는 셋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갯소리처럼 “콩가루 집안”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란 아이에게 그것은 웃을 일이 아니었다.

왜 어머니들은 떠났을까. 정확한 사정은 모른다.
다만 자라서 생각해보면, 장애로 인한 가난과 아버지의 독단적인 성격,
그 삶의 무게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3. 형제애라는 질문


나는 형제애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남들이 형제간 우애를 말할 때면 어딘가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부럽기도 했지만, 질투나 원망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그런 구조 속에서 자라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도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일 제사 때나 얼굴을 본다.
서로를 미워하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끈끈하지도 않다.

어릴 적 기억을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을 들추어도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형제애는 혈연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견디며 쌓이는 감정의 역사다.

우리에게는 그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핍이 생겼고, 그 결핍은 지금의 거리를 만들었다.

나는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반박할 생각도 없다.
다만 기록해 둔다.

흩어진 형제의 시간도 누군가에게는 한 시대였다고.
그리고 묻는다.
피로 이어진 관계보다
함께 견딘 시간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4. 제주에 남겨진 남동생


전화는 여동생에게서 왔다.
평소 자주 전화를 하지 않는 여동생이었다.
그래서 더 놀랐다.

“제주에 있는 작은오빠가… 사망했어.”

그 말은 문장이 아니라 파편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동생은 내가 집을 떠난 뒤 고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취업을 했고, 생계를 위해 집을 벗어났다.
각자의 삶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는 학교를 마치고 곧 취업을 했다.
첫 직장이었다. 나는 그의 하루를 알지 못했다.
그가 어떤 얼굴로 출근했고, 어떤 마음으로 퇴근했는지 묻지 않았다.

나도 바빴고, 그는 말이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의 시간을 짐작할 뿐이다.
직장 동료들과의 술자리.
술을 마실 때마다 계산은 그의 몫이었다고 했다.

처음엔 몇 번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반복되었고, 반복은 당연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싫다는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였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버티는 법은 배웠지만,
거절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돈이 나갔고, 결국 그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제주도로 내려가 혼자 살았다.
제주는 누군가에게는 낭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고립이다.

나는 직장 관계로 제주에 가보지 못했고,
여동생 부부가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고 화장을 해서 부산으로 온다고 했다.
그리고 부모님을 모신 추모공원에 같이 안장한다고 들었다.
5. 남은 사람의 마음


나는 그때 여동생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부모님이 병원에 입원하실 때도, 요양원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여동생은 항상 앞장서서 모든 병원비와 수속을 책임졌다.

내가 직장생활과 육아로 바빠 챙기지 못한 부분까지도
한마디 불평 없이 도맡아 처리했다.

그가 남긴 돈이 조금 있었다.
여동생은 그 돈을 형과 나의 자녀들이 결혼할 때
축의금으로 전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살아 있을 때는 제대로 건네지 못한 마음을
죽은 뒤에야 대신 전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형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그를 충분히 붙들어 주지 못했다.

형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내 마음은
지금도 가끔 무겁게 내려앉는다.

나는 이제 그를 탓하지 않는다.
나를 과하게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인정한다.
나는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던 형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리를 끝내 줄이지 못했다는 것을.